청백리를 골라보자

나라가 잘 되려면 청백리(淸白吏)가 많이 나와야 한다.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청백리는 태평성대에 많았다. 즉 청렴결백한 공직자가 많음으로 해서 태평하고 안락한 세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이 깨끗하고 재물의 욕심이 없는 공직자는 나라의 보배다. 이런 사람들은 나랏일을 볼 때 공정하고 사심없이 맡은바 자기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신속 정확한 업무처리를 하게 된다.

황희정신 닮았으면

조선 세종 때의 명신 황희(黃喜)정승은 임금의 신망과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었다. 그는 오랫동안 높은 벼슬을 지냈지만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도와주고 자기는 가난하게 살았다. 딸이 결혼할 때 혼수를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세종이 혼수를 보내 주었다고 한다. 그의 인자한 성품과 청렴한 생활에 대해선 많은 일화가 있다.

황희는 고려 말에 태어나서 이조로 들어와 문종(文宗)에 이르기까지 역대 상신(相臣)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황희가 출생하여 성장하기까지의 고려는 실로 다사다난했던 때였다. 당시 21세의 청년 황희는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27세에는 문과에 합격하였고 28세에는 성균관 학관에 보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황희의 파란 많은 벼슬길의 첫출발이었다. 흔히 황정승하면, 풍신 좋고 원만한 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황희의 성품은 너그러움과 강직한 면을 겸하고 있는 동시에 또한 무척 청렴하기도 했다. 특히 정무에 있어서는 시비곡직을 판별하여 정(正)과 의(義)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고 항상 의기가 곧고 바른말을 잘하여 파직까지 당한 그의 이력을 더듬어 보아도 알 수 있다.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실로 60여년이란 긴 세월을 관직에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18년간을 영의정에 있었고 세종조(世宗朝)32년 동안 반 이상을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꾸준히 세종의 선정에 힘을 보탰으니 세종시대는 황희 혼자서 정승을 지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또 동시대에는 맹사성이란 정승도 있었다. 황희 정승과 함께 조선초기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도 또한 깨끗하기로 유명하여 정승이면서도 집에 비가 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훌륭한 청백리가 있음으로 해서 세종 때는 역사상 가장 안정된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이다.

이 때 한글을 창출한 것을 비롯하여 나라 안팎으로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던가. 그렇다고 그 시대에 황희, 맹사성 두 정승의 청렴만으로 그 사회가 발전하였을까? 아니다. 왕을 비롯한 나라의 모든 관리가 두 정승 못지않게 청렴결백하고 근면 성실한 결과이리라. 법과 질서가 잡혀 있고, 집행이 공정하고,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시스템을 갖춘 사회에서는 부정이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

청산돼야 할 배금주의

요즘 우리의 세태는 어떠한가.

무슨무슨 게이트가 세상을 온통 어지럽히고 있다. 모범을 보여야 할 고위 공직자, 기업인들이 부정에 연루되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황희나 맹사성 같은 선비가 이 시대의 실상을 안다면 뭐라고 말할까...아마 선비정신에 따르는 자손심이 실종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청백리란 개인의 욕심이나 영달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예측을 생각하며 일을 하므로 업무의 계속성이 이어져서 능률적이다. 업무가 느슨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잘못 시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예산의 집행도 순조롭고 계획성 있게 시행됨으로서 막대한 재원손실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는 ‘돈이 최고’라는 극단적인 배금주의가 팽배해 있다.

정치권도 경제계도 돈 흐름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면서도 아직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 선진정치가 따로 있나? 5․31지방선거전을 보라, 날로 혼탁을 더해가고 있다.

하여튼 청백리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현대사회도 황희정승이나 맹사성 같은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지방정치도 더불어 사는 사회로 발전할 것이요, 선진사회로의 문화수준도 크게 향상될 것이다. 보다 청렴하고 어진 정치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청백리를 골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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