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층 마음가짐 바꿔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노블레스는 귀족 또는 사회지도층을 뜻하고, 오블리주는 사회적 책임을 뜻한다. 높은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사회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이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된다.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 초기 로마 사회에서는 지도층의 공공봉사와 재산의 기부 ‧ 헌납 등의 전통이 강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그들의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면서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희생 덕분에 로마는 작은 반도국이면서도 세계의 맹주로 우뚝 설수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 후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의 사회제도로 뿌리를 내리면서 계층 간 갈등과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또 그런 나라들이 부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는 두레와 품앗이, 향약 등과 같이 상부상조 정신 있기는 하지만 최근의 한국사회를 보면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 말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해이’라는 말을 더 자주 듣게 된다. 권력이 커지면 그에 따르는 책임이나 윤리 의식도 커져야 하는데 권력만 남용되는 사례가 너무 많다. 예컨대 뇌물 수수, 청탁, 병역 기피, 사치 접대 파동 등 사회지도층의 비리 들이 심심찮게 신문 지면을 장식하곤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대부분의 재벌 기업주들이나 또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인물들을 보면, 뇌물로 수억대 이상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물론 우리 사회에도 기부문화의 모델이 있기는 하다.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는 개인의 재산을 자식들에게 거의 주지 않고 모두 사회에 환원한 인사이다. 그는 1971년 작고 당시 유언으로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임을 강조했다. 이 말은 기업이 단순히 돈을 버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함을 뜻한다.

오늘날처럼 각박한 사회에서는 더욱 더 이런 정신문화를 계승하고, 사회적 가치관을 정립해야 한다. 비록 그 속도는 느리지만 다행히 우리 사회에 가치관의 전환과 공동체 의식 문화가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대체로 지도층의 솔선수범사례는 찾아보기 힘들고 오랫동안 지탱해온 도덕, 신의, 충성 같은 정신적 지주가 힘없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 대부분의 재벌 기업주들을 보라. 그리고 고위공직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아니 평생 축적한 개인 재산을 손자들에게까지 대물림하고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기업주들이 가끔씩 사회단체나 재단에 자선금 등을 내놓기는 하지만, 이는 기업의 이미지 관리와 홍보 차원에서 뿐 부의 사회적 환원이란 근본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또한 그런 과정에서 탈세 등 범법과 편법을 자행하고 있지 않은가. 간혹 기업주들이 가끔씩 모 사회단체나 재단에 자선금 등을 내 놓기는 하지만, 이는 기업 이미지 관리와 홍보 차원에 머물 뿐 부의 사회적 환원이란 근본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과거에 비해 요즘 우리 시민들의 자원봉사 활동 참여가 많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기부행위나 자원봉사 활동은 공동체 정신을 실현하는 매우 바람직한 시민 정신문화이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고는 하지만 국민소득이 높고 의식주 생활이 나아졌다고 반드시 행복지수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인간 문명사회는 올바른 정신문화와 도덕적 기반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해도 결국은 파멸의 늪에 빠지기 쉽다. 건전한 국가발전을 추구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정신적 병리현상을 치유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여 밝고 희망찬 미래를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선진복지를 이루어야 한다. 선진사회란 한마디로 좋은 사회, 건강한 사회를 의미한다. 시민사회가 ‘사랑과 박애의 공동체’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개인주의가 아닌 ‘공화정신적인 공동체’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소수만을 위한 생활문화 시대는 끝났다. 관주도의 획일주의에서 벗어나 현장중심의 다양한 자율복지 시대를 열어야 한다. 승자 독식이나 책임 회피, 자신만의 이익 챙기기 같은 도덕 불감증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표출되는 갈등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 세상에 굶주리고 병들며 외롭거나 공포 속에서 사는 사람이 있는 한 자신은 책임감을 느낀 다”고 까지 누차 말해 왔다. 그는 이 같은 믿음을 간직하고 삶을 이어 감으로써 사회적 정의를 확인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많은 슈바이처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정의는 죽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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