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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 유래...[합정동] 
 취재부 | 기사입력 : 20-04-06 09:52
 
 
조개우물 있었다 하여 동명 유래 절두산 천주교인의 물고문용 우물

합정동에는 조개우물이 있었다 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합정동의 유래가 되는 조개우물은 지금의 절두산순교기념관이 세워진 근방인데 처형장이던 이곳에서 망나니들이 사형도구로 쓰는 칼을 갈고 물을 품기 위해서 팠던 우물이다. 우물바닥에 조개껍질이 많아서 조개우물로도 불렀는데 이 우물은 천주교인을 한참 탄압할 무렵 이곳에서도 고문을 자행할 때 사용되었다. 천주교인의 물고문용 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강변도로의 건설로 없어졌다.
 합정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곳은 서울 외인묘지와 양화대교 진입 인터체인지 및 한강시민공원과 절두산순교기념관이라 할 수 있다. 양화대교가 놓여진 곳은 조선시대 서울을 출입하던 나루터인데 ‘동국여지비고’권2 산천조에 의하면 “양화도는 서강나루에 있는데 처음에는 나루지기인 도승을 두었으나 후에 별장을 두었다”고 하였고 관방조에는 “양화진은 1754년에 설치한 것으로 어영청 소속으로 별장이 있고 아장이 200명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 외 각종 문헌에도 양화나루에는 나루지기가 있으며 방어를 위한 진(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곧 고려 이래로 양천·강화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 양화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영조 이후에는 송파ㆍ한강진과 함께 서울 3진으로 요충지였다. 잠두봉 서쪽의 양화대교 동쪽지점인 양화나루를 큰나루라 하였으며 맞은편은 안양천이 유입되어 합류되는 지점을 연결하였다. 이 나루는 바다와 통해 있으므로 경상ㆍ전라ㆍ충청ㆍ경기도의 공세와 미곡을 서강의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조운(漕運)전용항구였다.
 조선초에는 용산강을 한강 으뜸의 항구로 쳤으나 수위가 낮아지면서 하류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1591년의 기록이나 1636년의 기록에서도 수위가 얕아져 양화나루 이상은 배가 다닐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양화나루 근방은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절두산성당이라 부르는 곳은 마치 누에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어서 잠두봉이라는 표현을 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정경은 그림과도 같았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용산서쪽에 마포ㆍ토정ㆍ농암 등의 강마을이 있어 모두 서해와 통하므로 8도의 배가 모여 들게 되어서 성내외 공후 귀족들이 모두 이곳에 정자를 짓고 놀이와 잔치장소로 삼았다”고 하였다. 한강진에서 시작된 뱃놀이의 마지막 지점이 되는 잠두봉 아래의 양화나루에 대해서 명나라 사신 예겸이 “도성에서 서남으로 15리쯤 가면 나루터가 있어 양화도라 하는데 대개 각 도에서 오는 군량이 와서 닿는 곳이다. 나루 어구에 푸른 돌이 수리나 되는 듯 한 넓은 산이 물가에 벽처럼 섰는데 푸르고 늙은 소나무가 많아서 마치 높은 관을 쓰고 칼을 든 이가 섞여 서서 서로 마주한 것 같다. 여기에 올라가면 한없이 조망이 좋았기에 걸어서 돌깔린 산마루에 올라가 소나무를 의지하여 모두 나무를 엮어 만든 난간에 기대고 바라보니 멀리 가까이 있는 돛단배들이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언덕 저 멀리에 기름진 논밭이 많고 촌가가 총총히 있다”는 표현을 한 것을 보아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경치로 되어있던 잠두봉 아래 모래밭은 조선 후기에 가면 일대변혁이 이루어지게 된다. 곧 앞서도 설명한 바 있듯이 천주교인의 대량 처형장소로 바뀌어지고 말았던 것으로 후일 절두산천주교성지라 불리는 곳이다. 합정동 96-1번지에 세워진 천주교 절두산순교기념관 자리에서는 병인박해 때 프랑스신부 9명과 남종삼바오르 등이 이곳에서 처형당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면서부터 잠두봉은 절두산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강뚝에서는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의 시체가 효수된 일도 있었다. 합정동 144번지에는 외인묘지가 있다. 양화진 진대(鎭臺)의 뒷동산에 해당되는데 1885년 임금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아 다음해부터 묘를 쓰기 시작해서 약 500기의 묘가 있다. 입구 가까이 있는 것은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의 묘와 우리나라 종교계ㆍ교육계에 공이 많은 언더우드부부와 그의 친묘, 이화여대에 공이 많은 아펜셀러ㆍ앨리스ㆍ베백카를 비롯해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설립자 더글라스ㆍ비ㆍ에비슨의 묘도 있다. 또한 1991년 4월 17일에는 대한결핵협회장으로 한국결핵사업의 선구자 셔우드 홀이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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