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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 유래...[현석동] 
 취재부 | 기사입력 : 20-06-24 14:23
 
 
검은돌이 많이 생산된다하여 현석리 농암에는 박세채가 소동루 짓고 살아

현석동의 동명은 이곳에 검은돌이 많이 생산된다하여 현석리라 부르던 것에서 비롯된다. 현석동의 유래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전해진다. 첫째는 농암(籠岩)이라 부르던 이곳에 조선 숙종때 문신인 현석 박세채(朴世采 : 1631~1695)가 소동루를 지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당쟁에 가담했으나 황극탕평설(皇極湯平說)을 주장하여 당쟁의 중재에도 힘썼던 박세채는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예학에도 밝았는데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숙종도 애도하면서 도승지를 보내 조상한 일도 있다. 그가 살았던 소동루는 177번지 강변도로 옆 언덕에 있었다. 중국의 동주에 비해 작은 곳이라는 뜻으로 붙인 소동루는 박세채가 말년을 보내며 집필을 했던 곳인데 강위로 나는 갈매기와 강상에 유유히 떠있는 황포돛배의 매력을 뿌리칠 수 없어 언제나 강쪽으로 나있는 문을 열어 두고 지냈다.
 그가 죽은 후 한때 소동루는 허물어지기도 했는데 안동김씨의 세도가 강화될 무렵에는 김병근의 첩인 나합이 이 별장을 갖고 싶어하자 박세채의 후손들로부터 거의 뺏다시피해서 나합에게 준 일도 있다. 나합은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안동김씨 세력이 극에 도달할 수 있도록 날마다 주연을 베풀어주었다. 또 방생(放生)이라는 명목으로 수만가마로 지은 흰쌀밥을 소동루앞 한강에 뿌려주었는데 흉년으로 기근을 면치못하고 있던 소동루 주변의 사람들은 강변에 묶어둔 나합의 배 밑에 숨어 들었다가 배가 출발하면 함께 헤엄쳐 가서 가마니채로 던진 밥을 담아온 일도 많이 있었다. 이 소동루는 다시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는데 대원군은 이곳 별장에서 지내지 않고 이따금씩 이곳으로 와서 강화교동으로 유배된 손자 생각만 하고 다시 공덕리로 돌아가곤 하였다.
 현석동이 된 유래의 두 번째는 현(玄)자에 있는데 "검을" "검은"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검은돌이 있는 부락이라는 명칭으로 현석이라 했으나 사실은 "현"이라는 의미는 노자의 「도덕경」에 의하면 '검은 계곡의 귀신으로 무한한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곧 음양의 조화에 맞추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산을 하는 곳이라는 뜻인데 밤섬과 노고산에서 내려온 능선을 타고 강가에 자리한 현석동은 만(灣)의 성격을 띄우고 있어서 어획고가 비교적 높은 곳이었다. 게다가 구릉지를 이용한 농업의 적격지였으므로 생산은 무한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이기 때문에 앞서 설명한 것처럼 "현석"을 검은돌이 많이 나는 곳이라는 단면적인 해석보다는 땅이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한 마을이라는 해석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지명인 흑석(黑石)은 곧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세 번째로 현석동의 유래에 대해서는 1929년 일본 동경에서 발간된 「조선강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이라는 책에 게재되어 있다. 곧 이 책에 의하면 원래 조선에서는 고려 때 사공으로 유명한 손돌이 있었는데 몽고군이 침입해오자 임금과 귀족들을 태우고 강화로 피난을 갔으나 겨울 북서풍 때문에 방향을 잘못 잡아 소용돌이치는 강 한가운데서 노를 놓치는 바람에 같이 탄 다른 귀족이 왕을 죽이려는 속셈이라 단정하고 배위에서 처형을 하였다. 그러나 뒤쫓아오는 몽고군을 유인하고 안전하게 배를 저어 임금을 피신시키려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서 이를 후회하며 죽은 사공을 잘 장사지내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이 손돌의 넋이 약 500년이 지난 후 이곳에 살던 현석이라는 사공에게 씌워졌는데 이 무렵은 청나라가 침입하여 조선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을 무렵이었다. 남한산성쪽으로 피신하려는 왕과 왕비, 왕자, 대신을 배에 태운 사공 현석은 닻을 올리고 노를 저어 강가운데쯤 갔을 때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고 조용하게 흐르던 강물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하였다. 멀리보니 다른 지역은 청명하기 그지없는데 유독 뱃길만 날씨가 험상궃자 배안에 탄 대신 가운데 한사람이 '이는 사공을 잘못 선정해 배를 젓게 한 것이니 당장에 저 사공을 산제물로 하여 용왕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날씨가 제대로 걷혀질 것이다'며 주위에 동조를 구하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말에 찬성하면서 마침내 제사준비를 끝냈고 결박당한 현석은 강물 속에 던져졌는데 신기하게도 날씨가 개이면서 사공없는 배가 맞은편 강가에 가 닿았다.
 배에서 내린 일행들이 현석리쪽을 바라보니 현석의 노모와 아내가 강가에서 땅을 치며 통곡을 했는데 이 때문에 그의 넋을 위로하는 사당을 차리고 1년에 한번씩 제사를 지내게 해주었다. 이것이 현석동 부군당(府君堂)이 만들어진 배경인데 현석동의 부근당에서는 반드시 사공 현석의 제사를 지내는데 조선말로 돌은 곧 석(石)을 가르키는 것이므로 손돌의 돌과 현석의 석이 같은 뜻이 있고 손은 지방에 따라서 선이라 발음하는 곳도 있으므로 곧 손돌은 선돌로 다시 현석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1929년도에 발행된 이 책은 설화 내용의 조사기간을 그보다 먼저 잡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 타당성도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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