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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전쟁 이야기 
 취재부 | 기사입력 : 20-06-23 10:50
 
 
[시인/동방 원] 한국정책포럼 고문 / 한국공무원문인협회 고문

6.25가 발발 한지 70년이 흘렀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6.25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면 그저 해맑게 웃고 만다.
그 처절했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해마다 유월이 되면 그때의 잊혀 젓던 이야기가 되 살아 난다.
 한반도 공산화가 목적인 북한공산군은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4시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감행 하였다. 무방비 상태였던 우리국군은 6.25 전쟁초반에 소련이지원한 탱크. 전투기. 중화기 등으로 북한 공산군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집 박에서 신음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군복에 총을 멘 피투성이의 퀭한 모습으로 서있는 국군 병사가 아닌가! 가슴에 V자가 세 개 새겨진 계급장으로 보아 이등 중사(지금의 병장)이다. 허벅지에 적탄을 맞아 관통상을 입고 있었다. 우리 국군의 지휘계통은 완전히 무너지고 각자 퇴각해서 수원으로 집결하라는 명을 받고 귀대중이라 했다. 병사는 허기를 달래기 위함인지 물 한 사발을 단숨에 마시고 한강을 건너야 한다며 헌옷 한 벌만 달라는 것이다. 입던 교복바지와 반팔 남방을 주었더니 황급히 갈아입고  절뚝이면서 한강 인도교를 찾아가던 모습이 7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병사는 어찌 되었을까? 새삼 그 병사가 생각난다.
 남침한 지 불과 3일 만에 점령당한 이날,  서울의 휴교령이 내려졌고 시민은 우왕좌왕 제정신이 아니었다. T-34 탱크를 몰고 인민군들이 지축을 흔들며 한강인도교를 향해 질주할 때 탱크의 도강을 저지하기 위해서 국군에 의하여 한강 인도교는 폭음과 함께 폭파되었다. 서울 시민들은 적군 치하에서 9월28일 수복 때까지 3개월간을 서울 근교 농촌으로 양식을 구하러 다녔고 옷이며 금붙이, 심지어 재봉틀을 싸들고 보리쌀, 감자, 호박으로 바꿔 먹었다. 먹거리가 될 만한 것은 모두 가져다 먹으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서울하늘에는 매일같이 유엔군의 폭격이 인민군의 집결지를 찾아 공습이 계속되었다.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젊은이들은 눈에 띄는 대로 인민군으로 차출되었다. 나는 이를 피해 고양시 벽제면 사돈댁이 있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전쟁 준비가 전혀 없었던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공산군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습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을 필사적으로 사수하여.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자 마침내 퇴각이 시급해진 인민군들은 청년들을 찾아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해 추석(50,9.26)날 아침, 가족들이 평화롭게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집안으로  다발총(多發銃)을 겨누고 들어서는 순간 젊은 사돈총각과 나는 총소리와 함께 밖으로 도피했다. 사돈총각은 집 앞 조밭[小米.좁쌀]으로 피하고 나는 논둑길을 뛰어 산으로 도피했다. 그 순간 총소리와 함께 조밭에 숨어있던  사돈총각은 바로잡혀갔다.
잡아온 청년들 수십 명을 고양동 벽제천에서 인민군들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날의 총성이 문득문득 들리는 듯 마음 한 자락을 가슴에 구겨 넣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유월이 되면 그때의 잊혀져가는 전쟁 이야기가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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